FEEL/읽기

덩샤오핑 평전 / 벤저민양 저 / 권기대 역

felixwoo 2008. 4. 17. 17:50

鄧小平은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사람이다. 단척에 여러 번 숙청되는 정치 위기 속에서 부활한 오뚜기란 애칭을 가진 사람이다.

 

농촌 지주 집안 출신으로 실용중의자인 부친을 영향을 크게 받았다. 파리에서 유학하고 모스크바에서 직업 혁명가가 되었다. 1930년대 초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마오쩌둥과 맺은 긴밀한 관계를 통해 당 서열상 쾌속 승진을 하였다. 그 후는 끊임없이 양극적 정신 상태 사이에서 허덕거렸다. 마오에 대한 부동의 권역에 대한 경외감과 어리석은 정책의 근원에 대한 경멸감이었다.

 

마오쩌둥 사후 “혁명에 대한 혁명” 을 덩 혼자서 시작한 게 아니다. 덩은 삼십년간 억눌려져 있던 개혁의 물결이 붓물처럼 터져 나왔던 1980년대에 그 물결을 따라 헤엄쳐 갔을 따름이다.

 

덩은 수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군사문제를 그다지 알지 못했다. 소련과 마르크스-레닌를 두고 유창하게 논쟁을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도 아니었다. 근대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적었지만 1980년대 경제재건에 폭넓게 관여했다. 국제문제 전문가가 아니지만 국제연합과 외빈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연설했다. 프랑스나 러시아에서 6년이나 살았지만 그곳 언어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

 

덩은 모든 일을 조금씩 할 줄 알았지만 어느 분야에도 전문가는 아니었다. 정치만 제외하고 말이다. 덩은 자신이 다른 무엇이 아닌 정치인임을 보여 주었고, 그가 정통했던 것은 정치의 핵심인 인간관계와 조직력이었다.

 

덩의 정치 철학은 통상 ‘실용주의’라고 불러 왔다. 실용주의라는 것은 ‘이론 없는 이론’이다. 덩샤오핑주의 역시 ‘철학 없는 철학’이다. 덩은 가난한 아프리카에 대한 관대한 지원을 줄이고 부유한 서양 각국과의 수지맞는 무역을 늘렸다. ‘중국은 제3세계의 지도자’라는 마오의 몽상적 주장에 상관하지 않았다.

 

덩은 정치적 통합과 안정이야 말로 경제 성장을 위한 전쟁에서 중국이 방어할 방패이자 적을 공격할 창이라고 했다.

 

덩의 사후 중국은 흔들임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덩은 1997년 사망하면서 터무니 없는 정책 노선을 남기지 않았고, 1976년의 마오와 달리 제 기능을 못하는 권력체계도 남기지 않았다. 마오가 사망한 후에 그의 정책이 번복된 것과 달리 앞으로 덩의 정책이 번복될 가능성은 훨씬 더 적다.

 

정권의 일당 독점이 중국 공산주의의 기본 특징이지만 이것도 조만간 변할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 추세가 계속된다면 몇 십 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을 것이다. 그럴 경우 세계 경제뿐 아니라 세계  정치에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덩이 말했던 ‘먹고 살 만한 수준’이나 ‘그런대로 편안한 사회’를 뛰어넘는 중국이 될 것이다.

 

사족으로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 덩은 숙청당하고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자신은 기계공으로 아내는 작업장 청소부로 일했다.  그리곤 1973년 2월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재미 있는 사실은 덩은 묵묵히 그냥 있었던 게 아니었다. 유배 온 후 몇 년이 지나자 덩은 마오에게 기회만 되면 수시로 편지를 보냈다.  아첨, 참회, 감상적 호소가 섞인 편지였다. 이 편지들은 마오를 움직였고 재기 할 수 있었다. 역시 그는 선비라기 보다는 실용주의 정치가다. 

 

장쩌민이 수 개 국어를 한다는 사실은 통역에게 도움이 아니라 골칫거리였다. 장쩌민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러시아어를 지껄이고 미국 사람들에겐 영어를 지껄였지만, 정작 상대편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외빈들은 장쩌민이 중국어를 말한다고 착각했고 중국인들은 그가 외국어를 한다고 생각했다. 통역들은 장쩌민이 말한 러시아어를 또 러시아로, 영어를 영어로 옮기면 그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을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외교부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당 중앙의 주의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MB의 실용영어는 어디까지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