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읽기

르 클레지오 / 아프리카인

felixwoo 2010. 7. 15. 11:32

아들이 어버이날에 나에겐 이스탄불, 엄마에겐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작가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자전적 소설이나 대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지루할 수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평범한 얘기다. 그럼에도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영국식민지 의사로 아프리카에 있다. 작가는 유년시절를 프랑스에서 보낸다어린시절 가족이 아프리카로 이주하여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에게 아버지는 낯설기도 했지만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남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버지가 남긴 사진들과 회상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노년에 접어든 작가는 이제 이 세상에 있지 않은 아버지의 사진을 통해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화해를 시도한다. 인정하든 부정하든 자신도 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식임을 새삼 느낀다.     

 

'쫓긴다는 강박에서 자유가 되는 날 그녀는 자신이 유괴되었던 그곳에 서 있다. 마침내 그녀는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바닷가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면,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어머니와의 화해, 유괴와의 화해, 세상과의 화해인 것이다자기의 태생, 자기 상황에 순응하며 그냥 사는 삶에서 벗어나 자각하게 된다. 그녀는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의 작품 '황금물고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해. 이해. 자각'이라는 작가의 일관된 생각을 느낄 수 있다. 

 

(Yes24 출판사 리뷰)

 

 

프랑스 현대문학의 살아 있는 신화 르 클레지오가 쓴 ‘나의 아버지’

 

5월 24일 대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방한하는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의 최신작 『아프리카인』(2004)은 작가의 명성에 비해서 좀처럼 거리 좁히기가 쉽지 않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단초가 될 만한 작품이다. 『아프리카인』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가 기획한 새로운 총서의 첫 장을 여는 작품으로, 르 클레지오는 ‘자전적 이야기’라는 기획 원칙을 깨고 192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아버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수록한 ‘아버지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두 달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라는 인간의 삶을 상상세계의 리얼리티 속에서 되살려내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정신적 모태이기도 한 아프리카 대륙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작품을 잉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보낸 작가의 유년시절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들의 근원이 결국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문학적 창조행위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내밀한 고백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그린 반소지방의 의료구역 지도를 비롯한 열다섯 장의 사진이 풍부한 시정을 더해주어,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마침내 화해하기를 시도하는 작가의 이야기는 한층 뭉클하게 다가온다.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에겐 모두 부모라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그 자손이 부모라는 존재를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아니, 그 이해의 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부모’이기 이전의, 젊고, 열정과 욕망으로 들끓고, 삶을 꿈꾸는 청년. 르 클레지오가 찾고자 한 아버지의 모습도 이와 같이 작가 자신과는 무관한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 대하여 작가는 “인정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의혹을 품을 수 있다”고 상정하며 서두를 연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 존재하며, () 모든 것이 우리를 통과하여 흔적을 남긴다.” 그 불가항력적...프랑스 현대문학의 살아 있는 신화 르 클레지오가 쓴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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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대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방한하는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의 최신작 『아프리카인』(2004)은 작가의 명성에 비해서 좀처럼 거리 좁히기가 쉽지 않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단초가 될 만한 작품이다. 『아프리카인』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가 기획한 새로운 총서의 첫 장을 여는 작품으로, 르 클레지오는 ‘자전적 이야기’라는 기획 원칙을 깨고 192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아버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수록한 ‘아버지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두 달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라는 인간의 삶을 상상세계의 리얼리티 속에서 되살려내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정신적 모태이기도 한 아프리카 대륙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작품을 잉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보낸 작가의 유년시절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들의 근원이 결국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문학적 창조행위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내밀한 고백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그린 반소지방의 의료구역 지도를 비롯한 열다섯 장의 사진이 풍부한 시정을 더해주어,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마침내 화해하기를 시도하는 작가의 이야기는 한층 뭉클하게 다가온다.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에겐 모두 부모라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그 자손이 부모라는 존재를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아니, 그 이해의 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부모’이기 이전의, 젊고, 열정과 욕망으로 들끓고, 삶을 꿈꾸는 청년. 르 클레지오가 찾고자 한 아버지의 모습도 이와 같이 작가 자신과는 무관한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 대하여 작가는 “인정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의혹을 품을 수 있다”고 상정하며 서두를 연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 존재하며, () 모든 것이 우리를 통과하여 흔적을 남긴다.” 그 불가항력적인 관계에 대하여 작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고 고백한다. “싫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관심을 두지 않고 피했을 뿐”이다. 그리고 노년에 접어든 작가는 이제 이 세상에 있지 않은 아버지의 사진을 통해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문학적 상상세계를 구축해준 ‘위대한 유산’ 아프리카

르 클레지오의 아버지는 청장년기를 아프리카에서 식민정부하의 의사로서 활동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아버지는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고향인 모리셔스 섬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건너와 의학을 공부한 후 도망치듯 아프리카로 떠난다. 작가는 짐작한다. 아버지가 불모의 땅으로 떠난 것은, 잃어버린 순수함의 무언가를, 삶의 우연이 그의 가슴에서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모리셔스 섬을 되찾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본원의 땅에서 시간을 거꾸로 흘러, 오류와 배반으로 얼킨 실타래는 모두 풀어져버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아프리카는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그가 발견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감격이 담겨 있다. 물론 타향살이의 소외감과 고독과 버림받음,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아득한 기슭에 가닿은 듯한 느낌 역시 읽을 수 있다.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의료 활동에 매진한다. 사촌 여동생인 작가의 어머니와 결혼한 후에는 함께 의료 구역을 순회하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신혼부부에게 아프리카는 생명과 자유의 땅이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은 가고, 어머니는 두 차례의 임신 때문에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곧 전쟁이 발발하여 아프리카에 발이 묶인 아버지는 프랑스도 독일에 점령당하자 아내와 아이들을 구하러 유럽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지만, 결국 그 시도는 좌절된다. 전쟁이 계속되는 8년이라는 세월 동안, 불확실한 미래와 싸우며 홀로 고립되어 있어야 했던 아버지에게 아프리카는 예전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한 부속으로밖에 작동할 수 없는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도 회의한다. 그리고 그 교훈은 그를 ‘실패’라는 비관적인 생각으로 밀어넣는다.
여덟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만나게 된 르 클레지오에게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단호하기만 한 존재이다. 전쟁 중이라 여자와 노인들에게만 둘러싸여 살았던 작가에게 ‘남성성’은 큰 폭력이자 충격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 ‘어른의 세계로 통하는 대기실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길러오던 머리칼을 자르고 아버지의 법질서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한 남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남성적 권위가 억압하는 폭력의 땅만은 아니었다. 작가는 아프리카에서 비로소 ‘삶’을 발견한다. 모든 것의 윤곽이 선명한 곳, ‘말’이 가진 이미지가 육박해와 몸으로 느끼게 되는 곳에서 작가가 발견한 것은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고, 아쉬움도 미래도 없고, 거의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은 단 한 순간”이라는 자유이다. 아프리카와 완벽하게 융화된 삶만이 완벽한 삶이라고 믿는 아버지 덕에 작가는 날것의 아프리카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유와 폭력이 공존하는 아프리카의 유산을 물려받고, 그 유산은 작가의 상상세계의 건강한 지지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기까지 작가에게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은퇴한 후에 프랑스로 돌아온 아버지를 보며, 작가는 아버지에게 아프리카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지 생각한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의무(
醫務)장교 적의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아프리카 소식에 귀기울이는 모습, 아프리카에서 쓰던 생활용품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아버지에게 아프리카는 온 청춘을 바친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에게 그 대륙은 ‘모든 것이 가능했고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자 ‘행복의 절정’이었던 것. 종종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놓고 몽상에 빠지던 아버지는, 결국 비아프라 대학살이 일어나자 돌아갈 것을 영영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계속될 침묵에 빠진다. 작가의 눈에 아버지는 “인생과 열정에서 추방되어 이방인이 되어버린 잔존자”라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남는다.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오마주!

『아프리카인』은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아버지에 관한 전기이자, 꿈과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한 청년이 겪은 열정과 좌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 대한 이국취향도, 그곳에서 보낸 유년기에 대한 향수도 아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실체와 감각들, 내 생에서 가장 논리적인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바르트가 말했듯 르 클레지오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밀한 자기 고백이다. 그는 아버지가 떨어뜨려놓은 조약돌 하나하나를 더듬어 나아간다. 차츰 작가의 기억은 아버지의 기억과 결합하고, 드디어 “지금 이렇게 쓰면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작가의 고백에 이르면, 읽는 이는 가슴 속에서 어딘가 툭 무너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육체(얼굴)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진정으로 이해하고 발견함으로써 끝나는 화해의 드라마이자,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오마주(경의)이다.  

 

 

아프리카인  르 클레지오 지음(2004) / 최애영 옮김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