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코엔 형제 감독
2008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등 8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된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다. 때 늦게 보았다. 사전 지식 없이 영화 제목이 주는 선입관을 갖고 봤다.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노인은 없었다. 난무하는 총탄, 피 튀김 그리고 냉혈 살인마가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긴장케 했다. 이야기는 정의와 룰이 있지만 없기도 하는 진퇴양난을 오간다. 아차 싶은데 빠져 나갈 출구는 없다. 그렇지 코엔 형제의 영화였다. 예전 이들이 만든 '파고'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피범벅이 된 끔직함에 몸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이 영화도 그랬다. 빠져 나오고 싶었지만 빠져 나오기엔 이미 늦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까?
코맥 맥카시의 동명 소설인 원작이란다. 줄거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막에서 영양을 쫓던 평범한 사나이 모스는 우연히 총격전의 현장을 발견한다. 참혹한 시체들, 다량의 마약, 200만 달러가 넘는 현금, 그리고 물을 찾는 중상의 생존자 사이에서 모스는 돈가방을 챙겨 그곳을 떠난다.
하지만 생존자를 외면한 것이 마음에 남았던 모스는 그날 밤 다시 현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마약은 사라지고 생존자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미지의 추적자들이다. 모스는 다시 예전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도망과 총격전, 음모와 살인 속으로 던져진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건, 조밀하고 단단한 시퀀스, 무뚝뚝해 보이는 어투와 잔잔한 독백이 교차하는 문체미의 앙상블은 이 작품을 고품격 스릴러, 완성도 높은 서부극으로 만들어 기존의 스릴러, 서부극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또한 멕시코 국경의 황량함, 다양한 형태와 구경의 총기들, 핏빛과 화약 연기들의 로컬 이미지 아래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그늘을 보여준다.
훔친 것을 지킬려는 자, 세상의 규칙을 거부하는 정교한 살인자, 항상 뒷북만 치는 보안관. 거기엔 정의도 룰도 없었다. 근데 왜 ‘노인’ 인가?
이 작품의 원제 ‘No country for old men’ 은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 의 첫 구절(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을 인용한 것이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서로 팔짱을 낀 젊은이들과 숲속의 새들,
저 죽음의 세대들은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취해 있고
폭포에는 연어가 튀고 바다에는 고등어가 우글거리니
물고기와 짐승과 새들은 여름 내내
나고 자라서 죽는 모든 것들을 찬양한다.
모두들 저 관능의 음악에 취하여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모르는구나.
늙은 사람은 한갓 하찮은 물건이고
막대기에 걸린 누더기니
다만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썩어 갈 모든 누더기를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노라.
오 성자들이여, 벽에 새긴 금빛 모자이크에서처럼
신의 성스러운 불꽃 속에 서 있는 성자들이여,
물레에 감긴 실처럼 핑핑 돌아가는 그 거룩한 불꽃에서 걸어나와
내 영혼의 노래 선생이 되어 주오.
그리하여 내 심장을 태워 주오.
욕정에 병들고 죽음의 동물성에 얽매여
그것은 스스로를 모르나니
나를 거두어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주오.
한 번 자연에서 벗어난 후엔 다시는
어떤 자연물의 형체로도 내 육체를 삼지 않으리라.
그리스의 금 세공사가
황제의 졸음을 깨우기 위해
황금을 두들기고 황금 유약을 발라 만든 형상,
혹은 황금 나뭇가지에 세워 두어
비잔티움의 고관대작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노래해 준
형상만을 취하리라.
그러나 작품을 읽어 보면 단순히 구절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아예 예이츠의 시에서 모티프를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거칠고 황량한 느낌의 이 작품이 ‘서정적’이라는 의외의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릴러 속에 살아 있는 문학적 울림, 이 작품의 매력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으레 나올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근사한 것은 되지 못한다. (자세한 해설은 http://blog.daum.net/blackbear031/17376639 참조)
왜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는가? 시를 읽어 보라. 그리고 작품을 읽어 보라. 다시 시를 읽고 작품을 보라.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가슴 한구석을 스쳐 가는 서늘한 바람,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둔탁한 충격을 느낄 것이다. 누가 노인인가? 벨인가? 모스인가? 혹은 바로 당신인가?
소설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나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책을 덮을 만큼 냉정하지는 못하다. 이해 못한다 하여 무가치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던져져 어쩔 수 없이 사는 드라이한 인생들이 비단 이들만 이겠는가?
영화가 시작하며 보안관의 내래이션이 흐른다. "14세 여아를 살해한 놈을 잡았다. 감옥에 넣었다. 감옥에서 나오면 또 살해할 것이라 한다. 왜냐구?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다고 한다."
박만규의 단편소설 '아침의 문' 에서도 그렇다. 그들에게 사는 것은 죽는 것 만큼이나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들도 그걸 말하고 싶은가 보다. "룰 속에서는 나란 의미 없는 존재고, 예측 불가만이 그들을 이길 수 있고 시간을 죽일 수 있다. 남들 보기엔 불편할 지 몰라도 내 식대로 살아간다. 그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황량한 삶들. 그것을 얘기하고 싶었나 보다. "해결책은 모르겠다. 근데 문제다." 라는 식으로..
태생적으로 싫고 징그러워 하는 소재지만, 보고나니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인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현세의 그늘이다. 소외되고 절망적이고 어쩔 수 없이 사는 삶들... 세상이 그렇게 흘러서는 안되는데...
이 영화의 제목으로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에서 차용된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는 뭘 의미하나? 아직 이해가 안된다.
* 인용 (그레이 색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