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읽기

무엇이 옳은가 (2020) / 후안 엔리케스 저 / 이경식 역

felixwoo 2022. 7. 1. 19:08

오늘날 우리가 ‘올바르다’ 혹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은 과거 사람들이 ‘올바르다’ 혹은 ‘그르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다르다. 기술은 윤리를 바꾸어 놓는다. 오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내일은 아닐 수 있다. 세상에는 용인되는 것과 용인되지 않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존재하고, 기술은 그 기준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촉매제 혹은 지렛대가 된다. 윤리적으로 결함이 많은 현 세상의 문제점들과 함께 기술의 진화로 초래될 '윤리의 진화 및 이동'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을 다시 설계하는 것이 옳은가)

 

페니실린과 피임약 덕분에 사람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공포에 떨었던 임신과 매독, 임질로부터 해방되었다. 섹스를 즐기는 일이 갑자기 용인되었고, 평생에 걸쳐 만나는 섹스 파트너의 수 또한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

 

과학은 성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흔들어 대고, 기술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여러 선택권을 제시한다.

 

하나의 인구 개체군 내에서 성적 지향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몇몇 연구 결과에 따르면 25세 이하 인구 중 남녀의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은 최대 3분의 1에 이른다고 한다.

 

외부 자궁, 유전자 편집, 줄기세포에서 난자 생성 등의 기술 발전으로 섹스 없이도 자손을 만들 수 있을 지 모른다.

 

힘센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폴리아모리(상대의 동의를 얻어 두세 명 이상의 사람이 사랑하는 상태) 가 지금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확산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파트너의 몸을 평생 독점하는 게 옳다는 발상보다 이런 관계와 발상이 더 윤리적이고 합리적이라 여긴다.

 

뇌 지도를 작성하여 뇌 기능에 개입하는 기술이 점점 발달하면 다수의 윤리적 질문과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디까지 뇌 기능을 조절을 허용할 수 있을까'와 관련된 질문들 말이다.

 

정신질환자를 범죄자로 만드는 일은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든다. 사이코패스의 뇌 배선을 바로 잡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사회는 사이코패스의 뇌를 강제적으로 바꿔야 할까?

 

(기술이 윤리를 바꾸는 것은 옳은가)

 

기후변화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들여야 하는 돈과 그 돈을 들이지 않을 때 미래에 발생하는 결과를 따지는 비용의 문제이자 동기 부여의 문제다.  기후 비상사태의 세상에서 청정 기술은 '하나의 대안'이 아닌,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길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에 해왔던 일들이 다른 대안들로 한결 쉽게 대체되면 후손들은 우리가 했던 일들을 혹독하게 비판할 것이다. 과거에는 그 대안을 선택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많은 비용이 드는지에 대해선 잊어버린 채 말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 전 세계의 인구가 폭발했다. 산업화 및 디지탈화가 진행되면서 지구 전체의 부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세상은 풍요롭지만 문제는 충분한 생산 혹은 재화의 효용성이 아닌 '분배'다.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가 넘어야 할 근본적인 과제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나중에 잘 살게 될 거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 및 손주가 자신들보다 더 여유롭게 잘 살 것이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승자독식이라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특징은 대부분 사람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느다. 어메리칸 드림을 떠 받치던 근본적 약속, 즉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약속은 이미 1940년에 무너졌다.

 

미국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57%가 자본주의보단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로 드러났으며, 18세에서 29세 사이의 사람들은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새로운 기술 하나가 예전의 관행을 대체할 때마다 '러다이트', 즉 신기술에 반대자라 칭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현 자본주의의 체제가 맞닥뜨린 주요 극복과제는 소득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 노동의 미래가 불확실하다 라는 점이다. 26명의 재산을 합친 금액이 세계 인구 절반의 재산을 합친 것과 같다는 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기술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를 형성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결국 사회적 차원의 어떤 폭넓은 거부권이 기술로 발생한 이득의 분배 방식을 좌우할 것이다. 이는 윤리적 공유에 관한 질문이다. 내일 오늘의 자본주의는 매우 냉혹하게 보일 수 있다.

 

트럼프와 그의 무리들이 집회, 미디어에서 하는 것은 그저 트루시니스(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인식하려는 성향)일뿐 과학과는 다르다. 트럼프가 직접 했던 발언는 4%가 진실, 11%가 대부분 진실, 14%가 반만 진실, 21%는 대부분 거짓, 33%는 거짓, 15%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를 구원할 거라 여겨졌던 기술혁명은 부의 불평등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더 빠르고 더 저렴해진 내로캐스팅과 SNS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 다른 이들이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들려주는 것을 듣는다. 편견은 편견을 한층 더 강화하고, 공동체는 제각기 다른 종족들로 갈가리 찢어진다. 그리고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개의 진실들이 등장한다.

 

정보에 훨씬 빨리 접근할 수 있고 또 교차확인 능력이 한층 커지면 터무니 없는 가짜 지식이나 뉴스는 엄청난 압박을 받을 거야.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오히려 의도적인 허위 정보와 거짓말이 우리를 홍수처럼 덮고 있으니까. 기술은 진실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인터넷의 익명성과 거리감 덕에 우리는 직접 만나선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게 되었다. 공개 담론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우호적인 친근함과 공동체주의 그리고 중도주의가 완전히 추방되었다. 개별적인 목소리들이 힘을 얻고 극단적이고 사악한 거짓말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특정 대상을 비난할수록 조회 수와 좋아요 수가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굳이 상대의 비난 강도를 낮출 이유는 전혀 없다. 이쪽 비난은 저쪽의 맞비난을 낳고, 그에 따라 다시 이쪽의 비난이 이어진다. 분노는 트래픽을 높이고 수익은 그와 비례하여 높아진다. 극좌와 극우는 점점 관대함을 잃고 저쪽을 비난하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믿으려 든다.

 

우리는 지금 도덕주의자처럼 구는 군중이 소설미디어에 모여 폭풍처럼 들고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대화의 내용과 분위기는 가장 많이 분노한 목소리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고, 거기에 성난 군중이 뒤따른다. 트위터는 지금 분노를 위한 공간이지 토론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대화나 경청과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으나 불관용과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검열관이 되지는 말자. (패트릭 차패티)

 

(어제의 세계는 지금도 옳은가)

 

지금과 같은 '자기 중심적 도덕적 판단의 시대'에는 단 한 번의 행동이나 한 통의 이메일 혹은 한 개의 댓글이 평생 일군 성과와 명예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거의 모두 자신이 옳음과 그름을 구분할 줄 안다고 믿는다.

 

노예제도의 역사는 사회에서 합법적인 것으로 용인되는 윤리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극단적인 예이다.

 

과거의 모든 행위를 현재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게 옳다면 2000년 이전에 발표된 책은 출판하지말아야 한다. 그런 책들은 분명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테니 말이다.

 

제각기 다른 시기에 제각기 다른 내용의 교육을 받고 자랐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오늘날 여러 윤리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절대주의를 버리고 하나의 개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겸손 말이다.

 

종교는 시간의 흐름에 맞춰 세태에 계속 적응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점차 소멸되고 만다. 대부분의 종교는 윤리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아 진화와 학습, 변화에 있어 자주 서툰 모습을 보인다.

 

로마인의 허락을 받아 그들의 이익에 부합했던 로마 기반의 교회는 정통 유대교 교회와 조금 달라서 한결 너그럽고 포용적이었다. 이 교회는 구약성서와 유대교를 점점 멀리하면서 수백년에 걸쳐 신약성서를 만들어냈고, 이런 식으로 신의 목소리인 성서는 진화했다.

 

종교가 기술과 문화의 움직임으로 그 권위를 도전받을 때 2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하나는 그런 변화에 맞춰 적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층 더 근본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엔 사멸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종교와 기술은 공생하며 진화한다.

 

모든 종교와 윤리, 영적 전통의 중심에는 연민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는 방식 그대로 항상 다른 이를 대접하라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황금률이다.

 

(SNS 속 무제한 자유는 옳은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모든 이에게 공개되고 분석되고 판단의 대상이 되는 시대, 이 극단적 투명성의 새로운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을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이 시대에 정말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남의 눈에 노출된다는 사실이 아닌, 남의 관심과 만족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인스타그램의 탄생 이유다.

 

노르웨이에선 1863년부터 매년 모든 개인의 연간 소득과 자산이 공개된다. 노르웨이 사회는 이런 유형의 금융 투명성에 익숙해져 있고 당연히 여긴다. 사람들의 소득 차이가 대부분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급격히 발전하는 기술은 우리의 삶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윤리적 행동과 비윤리적 행동을 가르는 기준에 대한 우리의 발상을 바꿀 것이다. 

 

(지금의 사회구조 시스템은 옳은가)

 

연주자나 미술가 처럼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생산성은 거의 제자리지만 비용은 꾸준하게 오르는 분야가 많이 존재한다. '보물의 비용 병폐'이론이다. 특히 비용 병폐가 만연한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서 많은 윤리적 악행이 발생했다.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라는 의식이 주도하는 곳에서는 근본적인 윤리적 변동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곳에서는 비윤리적 행동을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용인하게 되는 것이다.

 

의료제도의 헛점과 이익을 추구하는 제약사로 인해 다수의 목숨을 구하는 저렴한 치료법은 뒤로 밀리고 만다. 병원의 소득원 역할을 하는 노인 환자는 생애 불입한 의료보험을 통해 보조금을 받는다. 그에 반해 젊은 환자들은 많은 진료비를 내거나 응급실을 사용하거나 사망한다. 질병 예방이나 젊은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되는 예산은 거의 없다.

 

미국에서는 암에 걸렸다 하면 줄줄이 파산한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파산의 66%는 의료 관련 문제에서 비롯되고, 이때문에 해마다 50만명이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밀려난다. 독일인의 90%는 병원 청구서를 구경할 일이 없고, 프랑스에선 환자가 아플수록 의료보험 보장이 더 커진다.

 

미국에서 부채 규모가 가장 큰 연령층은 30~39세다. 이 세대는 학자금 부채와 자녀 양육 그리고 부모 부양이라는 짐을 한꺼번에 지고 있다. 수익을 추구하는 대학의 손아귀에 붙잡힌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벼랑 끝에 몰려있다. 교육비 지원 예산을 줄이는 것, 교육비를 지나치게 높은 수준으로 매기는 것은 사람들을 미래의 가난으로 내모는 확실한 방법이다.

 

미국 경찰과 연방정부 그리고 민간 이익집단들은 당신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세가지 방식으로 당신의 소유를 빼앗고 부유해졌다. 범죄 자산 몰수, 행정 자산 몰수, 시민 자산 몰수다. 과도한 몰수는 금지되었지만 모두 실현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 릴 것이다.

 

일회용품의 무분별하고 과대한 사용은 잘못된 것임을 예전부터 알지만 여전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 싸고 편한 것은 때때로 윤리를 짓밟는다.  

 

(당신의 옳음은 모두 틀렸다)

 

불법 체류자의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 놓는 것으로 모자라 나중에 부모가 다시 찾을 수도 없게끔 입양시키는 제도는 비윤리적이다. 어떤 국가든 자국의 국경선을 통제할 권리는 있지만, 잔인하게 굴어도 될 권리는 없다.

 

잔혹한 행위가 자리잡는 이유는 이런 터무니없는 엉터리 말을 진리라 믿는 추중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이 불법 이민자들보다 성실하고 능력이 있는 듯하지만 차이점은 단지 당신이 미국에서 태어낳기 때문이다.

 

옛날에 전쟁과 정복은 엄청난 돈벌이 수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그렇지만 갈등 해결에 더 빠르고 효과적이며 저렴한 대안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다. 전쟁을 멈추겠다는 윤리의 결핍은 우리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

 

'법조문을 정확하게 따름으로써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는 뜻의 신조어 동사 '네스터하다'가 생겨났다. 의약품 개발에서 출시까지 비용과 시간을 무시하고 안전에만 촛점을 맞추는 사람은 좋은 놈으로 보일수 있다. 그러나 좋은 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조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전통적 윤리학자의 주장은 때때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또 실제로 죽이고 있다.

 

(결론)

 

윤리는 진화할 것이다. 윤리가 바뀜에 따라 이전 세대는 이후 세대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과거 세대의 행동을 대하는 것이 좋다.

 

윤리에 대해 배운 내용을 무조건 고집하려는 태도를 버려라. 그리고 누군가가 당신과 의견이 다를 때는 당신이 믿지 않는 것을 그가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물어라.

 

우리는 이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서 이들의 견해에 반박하고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 사람들은 자기 신념이라는 맥락 속에서 우아하고 알맞게 행동하고 있는게 아닐까?

 

우리는 과연 지금 그 시대의 맥락에 비춰 당대 사람들의 행동과 믿음을 판단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지닌 옳고 그름의 잣대로 그들의 윤리를 판단하는 걸까?

 

기술은 강력한 촉매제고, 불가역적인 변화를 한 단계씩 높여간다. 이 변화는 윤리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윤리는 우리가 배우고 적응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각성해서 올바른 존재가 될 순 없다.

 

대신 수수함, 관대함, 공감, 공손함, 겸손함, 연민, 예의바름, 진실함 등의 여러 핵심 원리를 놓고 판단하자.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윤리적이기 위해 더 올바르기 위해 궁극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덕목이며 우리의 인간성과 시민사회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이다.

 

(이제 누가 판도를 바꿀 것인가)

 

윤리를 갖지 못하는 종교, 이데올로기, 기술은 끔직한 결과를 낳는다.

 

일반적으로 중국은 다수를 위한 큰 공동선, 공동체, 안정성, 통제 등을 중요시 하고, 유럽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미국은 기술 분야의 거대 기업과 사업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국은 사회의 총체적인 복지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지배적인 국가가 된다면 세계는 예전과는 다른 윤리적 우선 순위와 법칙이 확산될 것이다.

 

인간 중 가장 똑똑한 사람보다 수백만 배나 더 똑똑한 기계를 우리가 소유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노예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해줄 것인가를 상상하기란 정말 어렵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진화하는 기계를 인간이 갖게 되면, 기계를 기반으로 하는 윤리적 논리는 최초에 인간이 설정한 것과는 전혀 다른 논리를 나타낼 것이다.

 

코로나19 사망자 수십만 명도 기후변화와 같은 것이 몰고 올 충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물쭈물하다가 행동 시점을 놓쳐버리면 기후변화 문제 해결엔 수백년,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