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 그리고 구이린
(작성일 2002년 8월)
중국은 땅이 넓다 보니 볼 것도 많고 서린 애환도 많다.
계림 (桂林,Guilin). 이 지역에 계수나무가 많아 붙여졌다 한다. 계수나무는 도시 가로수는 물론이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다. ‘반달’ 동요에서 계수나무가 나온다 상상 속의 나무로만 알고 있었는데 현존하는 나무다. 계림의 산수는 중국 제일 절경으로 친다고 한다. (北京 용경협을 ‘작은 桂林’으로 칭하는 것을 보면 桂林이 절경의 대명사임을 알 수 있다.)
동양화에서 보아 왔던 신비하게 생긴 산봉우리들이 있는 곳이다. 전만 해도 그런 산봉우리는 본 적이 없으니 비사실적인 풍경화라 여겼었다. 우리나라 산 절경은 깊고 높은 산맥 중에 있으나 계림은 평지에 형성된 산들로 그리 높진 않다. 일반적인 산들에 비해 허리는 아주 가는 봉우리들이 조밀하게 도열한 특이하고 희안한 자태와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봉우리들 사이로 이강이 흐른다. 이강을 흐르며 동양화 같은 산세 속을 경외감에 비몽사몽간에 신선이 된다.
이강에서 본 주변 절경
계림에선 계림을 닮는다
관음동굴. 유람선에서 내려 한 기슭에 위치한 관음동굴 입구로 들어갔다. 장구한 지구의 역사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장대하고 엄청난 종유석들이 가는 곳 마다 장관을 연출한다. 전설 속의 이야기를 담은 형상도 있고, 어떤 것은 동물의 형상도 담고 있다. 가이드는 신비한 자연현상이 빗은 형상을 인간중심의 설화로 풀어내려 하나 인간 중심적인 오만함이 느껴지는 유치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한참을 가니 무개궤도 열차로 연결된다. 머리가 닿을량 말량한 좁은 동굴로 열차가 지난다. 옇차에서 내려 걷다 보니 난데없는 힘찬 물소리가 들린다. 앞에 긴 다리가 보이고 다리 밑으로 사람도 떠내려갈 정도의 급류가 흐른다. 졸졸 흐르는 물이 아니라 유속이 빠르고 수량이 많은 하천급이다. 굴속에서 하천이라 참 신비한 기분이다. 하천을 건너 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니 십여 명이 승선하는 보트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다. 이제는 보트를 타고 감상하는 구간이다. 보트를 타고 깜깜한 굴속을 보트에 장착되어 있는 조명등으로 주위를 비추며 감상한다. 보트에서 내리니 2인승 궤도차가 기다리고 있다. 궤도차는 지하에서 한가로운 전원풍경이 펼쳐지는 지상으로 연결된다. 짙은 녹음과 삶의 터전들이 눈에 들어온다. 종착점이다.
관음동굴에서 모델료 받는 소수민족
관음동굴에서 나오는 2인용 궤도차
북파산. 시내 중심지에 있다. 이곳 산 봉우리와 같은 형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계단으로 급하게 올라가야 한다. Guilin 시가지와 주변 산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Guilin의 아름다운 산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중에 하나다. 중간에 절도 있고 내용과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얽킨 사연은 꽤 있을 것 같은 문장이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북파산에서 본 桂林
북파산 중간 암벽에 세겨진 많은 문장
발 마사지. 부지런하게 걸어야 더 많이 보고 얻는 것이 많다. 하루가 저물 때가 되면 다리가 저려오고 발바닥이 아프다. 물론 기분 좋은 통증이지만. 이런 연유에서인지 마사지는 동남아 관광지 어느 곳에나 있다. 태국 전통 마사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도 마사지 호객이 있었고 작년 북경 발 마사지를 했었다. 중국 발 마사지는 여행 패키지에 포함 되어져 있어 거북함이 덜 하다. 그만큼 건전하고 대중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업소는 북경보다는 시설이 잘 되어있었다. 야트막하게 칸막이가 된 구역에 10개의 안락의자가 마주보고 설치되어 있었다. 약초가 가미된 온수에 발을 담가 가볍게 씻은 후 발을 주로 하는 마사지에 들어갔다. 시원하다. 이곳도 남자 손님에게는 아가씨들이 여자 손님에게는 청년들이 서비스하였다. 연령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아내의 경우 북경에서는 머리가 벗겨진 중년 아저씨가 나와 부담을 주더니 이번에는 미 청년이 나와 마음이 편한지 희희낙낙 한다.
소수 민족쇼. 저녁식사 후 비교적 시설이 좋은 극장(離江劇院)에서 열렸다. 초반에는 국적불명의 할리우드 쇼와 같더니 중반으로 접어들어 소수민족의 애환이 깃드린 곡에 민족 고유 의상들을 입고 무용과 연기를 한다. 화려한 의상과 나름대로의 풍습을 무용을 통해 연출한다. 무대 옆에 있는 전광판에 새로운 장마다 한자와 영어로 표시되어 이해를 돕는다. 알아먹는 한마디의 언어의 힘이 많은 이해를 돕는다. 볼만하다.
소수 민족 쇼
요산. Guilin의 이튿날 관광은 옵션으로만 이루어졌다. 가이드가 제안한 양삭, 요산-웅호산장 중 후자로 결정되었다. 리프트 카로 요산을 올라간다. 2인승 리프트 카는 꽤 긴 구간이었고 산 위 나무에 다리가 스치듯 올라가니 폐쇄적 공간인 케이블 카와는 다르게 신선한 공기와 피부를 스치는 안개의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멀리 가끔씩 보이는 산세는 정산에서는 보는 조망풍경을 예고하듯 아름답다. 정산이다.
요산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Guilin의 산수가 한눈에 잡히기 때문에 오른 듯 하다. 지상의 조망한계로 평면적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산수가 이제는 입체적으로 보인다. 절경이다. Guilin은 평지이고 길쭉한 종루모양의 산들이 수평선 가득히 들어차 있다. 평야와 적절히 배치된 봉우리, 고저가 잘 조화된 산세. 원근을 더욱 깊이 있게 하는 안개. 어느 예술가가도 창작하지 못할 자연미의 극치다.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파인더로 보이는 밋밋한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다. 우리 부부는 리프트카로 하산했고 현기는 젊은 일행들과 어울려 중간에 봅슬레이로 내려왔다.
요산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계림
계림에 가면 계림을 닮는다
첩채산. Guilin 시내에 있는 복파산에 이어 두 번째 높은 산봉우리다. 가파른 계단 7백여 개를 오르니 정산이다. Guilin시의 전경이 들어온다. 복파산에서 보는 정경과는 다른 전경이고 그 보다는 더 아름답다. 정상을 둘러놓은 난간에 자물쇠 꾸러미가 주렁주렁 달려져 있다. 남녀가 굳은 사랑의 정표로 채워놓는다 한다.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후손들이 만들었다.
첩재산의 자물쇠 얘기를 듣고
웅호산장. Option이었고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별로 할 일도 없고 하여 들어갔다. 입구부터 유치한 호랑이와 곰 모형의 조악한 수준이 마음에 걸린다. 곰과 호랑이가 주종이고 우리나라 동물원보다는 넓은 자연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라는 호랑이가 들소를 잡아먹는 쇼 시간에 맞춰 10분전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고 여기저기 기대감에서 나는 감탄소리와 박수소리가 만만치 않다. 이제 하이라이트다. 들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조만간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모른 채 희희낙낙 하는 우리를 보는 듯 하여 게름 직 하다. 인식하지 못해 느긋한 것 지 어찌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체념한 것인지…
드디어 호랑이 한 마리가 들소 우리로 들여 보내진다. 생각으론 금방 덤벼들 것 같던 호랑이가 멀찌감치 배회하고 잡초 덤불 사이에서 엎드려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양육강식의 룰이 지배하는 자연이라도 절대 강자라도 준비 단계 없이 성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호랑이가 들소의 목덜미를 문다.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비로서 들소는 뿔로 저항한다. 그 몸 트림이 필사적이다. 은연중 들소 뿔에 차여 달아나는 호랑이를 그린다. 그러나 들소의 몸통에서 선혈이 흐른다. 아직도 호랑이는 물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동물의 왕이란 자가 거머리 같다. 적어도 으르렁 포호 소리에 상대방을 오금이 절여 풀석 주저 앉아버리게 하는 절대 강자를 상상했는데… 아니면 정 반대로 호랑이가 혼줄이 나서 퇴각하는 역설적인 장면을 바랬는데… 싱겁다. 별로 보고 싶지도 볼 가치도 없는 곳이다.
시안. Guilin이 순수한 자연의 작품임에 반해 西安(xian)은 철저히 인간이 만든 작품이다. 실크로드로 가는 출발지이기도 하다. 그 옛날, 이 곳은 장안으로 더 잘 알려진 도시다. 20세기 들어 이름이 서안으로 바뀌었지만 주(周)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의 번영을 누린 도시다. 고대 중국의 중심지였던 땅이다. 특히 1천500년 전 당대의 장안은 세계 제일의 국제도시를 자랑했다. 동서문화가 이곳에서 교류하면서 찬란한 유산을 잉태시켰다. 물론 실크로드가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비단길을 통해 들어온 중앙아시아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화려한 ‘장안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기원전 200여 년 지금으로부터는 2천2백년 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믿기지 못하는 역사의 잔재들이다. 우리 유물이 몇 백년 전인 것에 비하면 경이할 정도로 신비하고 찬란하다. 우리 역사의 시작인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진나라. 4대 문명의 발생지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화청지
진시황의 황릉. 야트막한 산이다. 지금 언덕배기에는 석류과수단지가 조성되어있다. 아직도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과학적인 탐사로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진시황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궁전은 4층으로 되어 있다 한다. 궁전위로는 지상과 마찬가지로 시각, 계절에 따라 움직이고 유희를 위한 무희들, 주위 나라 대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한다. 한가운데는 진나라의 영토 모형이 있고, 그 위로 진시황의 관이 떠다닌다고 한다. 잘 믿기지 않는 얘기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신비감이 느껴진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 영화에서 보는 이집트의 신비처럼. 하산하며 찐 옥수수를 샀다. 집에서 먹는 맛보다 좋다. 많이 움직인 탓이리라.
진시황 능 초입 계단
능이 산이다. 계단 중간에서 잠시 쉬며
병마용갱. 진시황릉의 동쪽입구에 위치하며 황릉의 일부이기도 한 병마용갱이 있다. 진시황의 병마용갱에 가면 그 규모에 놀란다.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라는 병마용갱은 그 명성에 걸맞게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지난 1974년 초봄 한 농민이 우물을 파다 발견했다는 병마용은 지금도 발굴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
거대한 돔으로 덮힌 갱으로 들어서자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이 눈을 압도한다. 178∼187cm 크기의 병사 6천 여명이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그 규모와 모습에 전율한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이처럼 수많은 병마용들의 얼굴 표정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계급과 신분, 그리고 맡은 역할에 따라 복장이나 들고 있는 무기도 각각 다르다.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한 얼굴 표정에 몸이 떨린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의 일부분일 뿐이다. 1974년 발견 당시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던 웅장하며 경탄할만한 사진 속의 장면이다. 발굴 당시에는 모든 병사들이 채색되어 있었으나 탈색 되어져 지금은 색깔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도 계속 발굴 중에 있다고 한다.
4갱까지 둘러보고 박물관에 갔다. 발견 당시에는 부셔져 있던 전차가 복원 되어져 유리 상자 안에 전시되어 있었고 병마갱에서 나온 4가지 유형의 인물-궁사, 병사, 장군, 문관-이 자세하게 볼 수 있도록 역시 유리상자에 진열되어져 있다. 자세히 보려 잠시 시간을 둘라치면 가이드와 일행들이 보이지 않고 급히 쫓아가면 벌써 가이드의 설명을 놓치기 일수다.
박물관 한편에서는 용마갱에서 나온 흙으로 빗은 정품(?) 병마용 발굴유물 모형을 판매하고 있었다. 가격을 반으로 깍았음에도 입구 잡상인들의 비품(우리돈 천원에서 2천원)에 비해 엄청나게 비쌌다. 30cm 정도의 중자 하나에 200위엔(정가400 위엔)에 구매했는데 결국 상술에 꼬득여져 3개를 샀다. 중국이 자유경제 체제를 도입하면서 우리와 다르게 특이한 것은 공공기관 (박물관, 한의병원) 에서 적극적인 영업행위를 한다는 점과 가격도 일반 상거래 행위와 다름없이 정찰제 아닌 에누리 거래를 한다는 점이다.
병마용갱의 발견 당시의 얘기가 재밌다. 옮기면 1973년 3월 29일. 당시 가뭄을 막기 위해 상급에서 우물을 파도록 결정이 내려와 서양촌에서는 우물을 마을 남쪽 160m 되는 감나무 밭 곁에 파기로 결정했다. 여기는 여산충적선(驪山沖積扇)의 전연에 위치하여 기나긴 세월을 거치며 산 위의 진흙이 침적된 곳이다. 3월 24부터 파기 시작했는데 깊이 3m까지 파고 들어갔을 때 벌겋게 탄 흙과 소결된 흙덩이, 재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그냥 오랜 기와 따위라고 생각하고 계속 파 들어갔다. 그러다 우물 서쪽 5m까지 팠을 때 어두운 불빛아래 "병마용"의 얼굴이 나타났다. 촌민들이 놀라워하고 있을 때 공사(公社)간부 방수민(房樹民)이 진도 시찰하러 왔던 것이다. 방수민이 우물 밑에 내려가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발견된 벽돌이 진시황릉 부근에서 발굴된 벽돌과 똑 같았다. 그는 즉시 우물파기를 중단시키고 급히 현 문화관에 달려가 사실을 보고하였다. 드디어 병마용이 발견 되였다고 한다.
병마용 대열
병마용 발굴현장 전시실
사령관실
병마용 박물관
엄청난 비석을 모아놔 비의 숲(碑林) 이라나
말고삐를 매어놓는 돌기둥에 말들이 되어
대안탑. 서안시내에서 4km 떨어진 자은사(慈恩寺) 내에 자리잡고 있다. 자은사는 648년 당대 황제 고종이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만든 절로 현재의 모습은 청대에 재건축한 것이다. 대안탑은 중국에서 유명한 불탑 중 하나로, 652년에 당(唐)나라 현장(玄奬)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7층의 누각식 전탑으로 총 높이가 64m에 기반부 둘레는 25미터이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탑 내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가 있다. 매 층의 사방에는 각기 하나의 아치형 문이 있어서 먼 곳까지 내려다볼 수도 있다.
경내를 둘러보는 자유시간에 우리 식구는 인당 2달라 씩 내고 대안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목재 계단이 사각 나선형으로 배치되어 올라가도록 되어있었다. 중간에 부처님의 족적을 새긴 판도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보호창살이 쳐진 아치형 창문으로 서안의 시내가 멀리까지 내려다 보였다. 쪽 뻗는 대로 네모 반듯하게 블록화된 도시지역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예 도시라기보다는 계획에 의해 세워진 현대도시와 같다.
대안탑처럼 우뚝 서거라!
대안탑 꼭대기 천장 문양
대안탑에서 본 西安
시내 성곽. 서안에서의 저녁은 가이드가 추천한 Option(쇼, 발 마사지) 대신 가족과 같이 시내 성곽을 가보기로 했다. 마침 묵은 호텔이 시내 중심인 성곽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해외여행 처음으로 가족끼리 택시를 타려니 아들녀석이 불안한 표정이다. 그냥 걸어서 가자고 한다.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거리를 구경할 겸 걸었다. 아직은 자유경제체제가 활발하지 않아 구경할만한 상점이 그리 있지는 않다. 특히 미용실이 많은데 가이드에 의하면 미용도 하고 유곽 구실도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30여분 걸으니 웅장한 성곽과 북문(?)에 다달았다. 성곽은 로타리 가운데 거대한 섬처럼 도로에 포위 되어져 건널목이 없어 적절히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한다. 북문은 웅장했고 둘레는 비교적 폭이 넓은 해자가 있다. 그 위로 다리로 연결 되어져 있었다. 다리에는 가로등처럼 양쪽으로 홍등이 켜져 있었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공안원이 오는 사람은 오는데 가는 사람은 막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성벽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 위해 우회하여 갔다. 어스름한 길 한편에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둘러 싸고 있다. 가보니 야외 무도장이었다. 둥근 무도장 가운데에 높이 달린 구만 빙글빙글 돌아가며 빛을 내고 있을 뿐 자연의 어둠이 내려져 어둑어둑했다. 중년이상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시내 중심부로 들어왔으나 화려한 건물은 주로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들이다. 이미 시간이 지나 문은 닫혔고 차 한잔 마실 마땅한 장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길 건너 익숙한 KFC매장이 보였다. 아이스크림과 콜라를 사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분의 스푼을 얻기 위해 긴 body language와 시간이 필요했다. 호텔로 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나는 그래도 안전해 보이는 여자 운전사가 모는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처와 아들이 차를 잡아 손짓한다.
남자 기사 옆에 올라타면서 ‘시안호텔’ 했더니 알아 먹였는지 몰기 시작한다. 그래도 못 믿겨워 중국한자가 병기된 호텔명함을 보여주니 본체만체 하고 고개만 겨우 보일 만큼 가딱거린다. 호텔 앞에 내려 10위엔을 주니 뭐라고 한다. 미터에는 5위엔 인데 왜 그런지 답답하다. 호텔 도어맨이 뭐라 얘기하더니 프론트에서 잔돈으로 환전하란다. 잔돈이 없다는 얘기였구나. 기다린 시간도 보상할 겸 팁으로 1위안을 건네니 적극 사양하다 받는다. 아직은 물이 들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번 여행은 중국 서북항공이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잇는 왕복 국제선과 서안-계림을 왕복하는 국내선이 모두 동일 항공사였다. 얼마 전 부산에서 추락한 항공사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고 나기 전까지만 해도 무사고 비행사였다나. 죽고 사는 것은 재천이니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안이다. 승무원 복장, 비치 책자, 서비스 태도, 제공 물품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한다. 탑승할 때마다 기념으로 준 우산이 모두 9개였다. 아들 녀석 친구들에게 기념 선물로 주고도 반이 남았다. (여행기간 2002.8.14 - 2002.8.18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