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암 촘스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캡틴 판타스틱’을 통해서다. 오염된 문명에 회의를 느낀 한 부부는 문명과 격리된 자연 속에서 육 남매를 교육한다. 체력 훈련, 독서, 토론을 통해 뛰어난 체력과 식견을 갖춘 지식인으로 육성한다. 자녀들은 촘스키에 영향을 받은 듯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기업이 어떻게 권리장전을 악용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고 ‘민중에게 권력을, 권위에 저항하라’라는 촘스키의 저항 정신도 배운다.
국가와 거대 기업들이 언론과 지식인을 이용하여 선전을 통해 세상을 지배한다고 촘스키는 주장한다. 인간이 만든 어떤 창조물도 설령 그것이 물질이든 문명이든 완벽한 것은 없어 보인다. 촘스키는 그 취약한 부분과 위선적인 부분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어찌보면 칭찬 거리 보다는 헐뜯을 거리를 찾는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보인다. 자신은 사회가 주는 온갖 혜택 속에서 풍요와 평안을 누리면서 사회를 비난하는 모순된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 아들은 촘스키를 ‘강남 좌파’ 라고 비아냥 거린다.
하지만 촘스키가 행해온 일련의 작업과 지적 통찰은 결국 ‘표현의 자유’와 ‘진실의 규명’으로 귀결된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에 앞서 현실을 그대로 말하는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팩트들을 접한다. 하지만 이 팩트들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거나 오염되었다면 진실에 다가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나 개인 미디어가 활발해진 현재는 가짜 뉴스가 적지 않으니, 촘스키가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양식 있는 시민’이 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이하 촘스키 대화 인용)---------------------------------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된 말은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꾸민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현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때 우리 모두가 진실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권력의 중심은 부자나라에 있습니다.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들어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과점 형태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독재적 성격을 띤 기관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가정책은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면서까지 다국적 기업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말입니다. 다국적기업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만, 국민 앞에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폭력적 수단으로 노동자를 억압할 수 없게 되자 기업주들은 선전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과학적 방법’, 즉 노동자의 정신을 통제하는 수단을 동원한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눈 앞에 벌어지는 일에나 관심을 갖는 ‘구경꾼’의 역할이어야 했습니다. 교육제도가 순종과 복종을 조장합니다. 이런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제됩니다.
금융시장과 투기시장도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투자 방향을 짐작하는라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 지수가 미친듯이 널뛰기를 합니다. 대공항에 버금가는 대폭락이 일어나고, 거꾸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환경에 대한 여론의 우려는 대단하지만 우리는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기적 결과가 무시되어 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환경 재앙으로 치러야 할 비용은 현재의 시장에서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미래세대의 몫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는 셈입니다.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주의처럼 사람 이름이 붙은 학설은 일종의 종교로 미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학설이 그 인물을 신격화하기 때문에 사람 이름이 붙어진 것은 무조건 의심해봐야 합니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도 일종의 종교였습니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사회를 흥미롭게 분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유용한 생각은 기꺼이 수용해야겠지만, 필요하다면 부연 설명을 달거나 수정해야 합니다. 또한 정확하지 않고 적용할 수 없는 생각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닫아야 합니다. 주변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는 어떻냐고요? 괜찮습니다. 특권층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런 특권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는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합니다. 이런 곤경에 처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나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봐주면 고맙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투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관계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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