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읽기

섬 / 장 그르니에 저

felixwoo 2019. 4. 6. 12:53

역자는 이렇게 이 책을 얘기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목소리가 높은 주장, 무겁고 난해한 증명, 재치 있는 경구, 엄숙한 교훈은 많으나 아름다운 글은 드물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자신이건 영국인들 또는 다른 사람이건 그게 뭐 중요한가? 그저 통치만 하면 될 것 아닌가? 누군가가 집안 살림을 맡기는 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 일을 맡겠다니 우리는 쉬기만 하면 된다.

 

불연속적인 것을 연속적인 것으로 - 연속적인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 둔갑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다 제거해 버리는 편리한 방법이 진화라는 개념이다. ...출발점을 도착점으로 착각하는 결과가 된다.

 

인도는 기껏해야 바람에 불리는 파리 새끼의 날갯짓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인간적 삶 따위는 무시하며 요지부동이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한 일-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자기 인식>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심브로네 테라스의 포석들 위에 가만히 엎드려서 나는 대리석 위에 춤추는 빛을 내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있었다. 나의 정신은 그 투명함과 그 저항의 유희 속으로 가뭇없이 빠져들더니 이윽고 고스란히 회복되었다. 나는 모든 지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바로 그 스펙터클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탄생을, 나 자신의 탄생을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다른 존재가 태어나는 것일까? 구태여 다른 존재랄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그때서야 비로서 <존재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행운의 섬들)

 

------

 

장 그르니에에 영감을 받고 까뮈가 실존주의가 스며든 문학을 일구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났다. 까뮈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 당한 한 인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이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