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풍족한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주인공 시마무라는 가족을 도시에 두고 혼자서 여행을 다니다 산골 한가한 온천마을에서 게이샤 고마코를 만난다. 그녀는 연회에 불려다니며 술에 쩔기도 하지만 부르지 않아도 그의 객실을 드나든다. 가끔 술에 취해 그의 방에서 밤을 지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집에서 잔다.
일본 게이샤는 동시대의 우리의 기생과 비슷하지만 신분제라기보다는 직업개념이 강하게 느껴진다. 채무만 청산하면 언제든 그만 둘 수도 있고 여관에 등록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자기 의사에 따라 수입을 결정하고 강요당하지는 않는다. 비천한 신분이 아니라 접대하는 직업인이다.
도시와 가족을 단절시키는 국경터널을 넘어 순백을 나타내는 눈의 고장에서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깨끗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시간이 가면서 서로의 마음을 열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일년에 한번 뿐인 만남을 그리워 하게 된다. 작가는 사랑이란 구체적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은연중 느끼게 한다. 순백의 순수한 감정들이지만 비현실적이기에 안타까움이 더 한다.
‘시마무리의 손도 따뜻했지만 고마코의 손은 더 뜨거웠다. 왠지 시마무라는 이별할 때가되었다고 느꼈다.’ 이 세상에서는 거기가 경계다. 시마무라가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울었다. 이별을 직감하고 헤어지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당신이 가고 나면 나는 성실히 살 거예요’ 하고 고마코는 말한다. 그것이 직업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말이기도 하지만, 눈의 고장에 핀 청순한 한 여성의 허무를 담고 있다. 고마코는 생계를 위해 게이샤를 선택했지만 사랑을 원하는 한 여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화의 상징인 온천을 중심으로 그들은 정을 쌓아간다. 헛 일 인줄 알면서... 어느 날 마을에서 화재가 일어난다. 고마코가 전에 기거하던 곳으로 시마무라의 추억이 있던 집이었다. 불은 순백의 눈을 녹이고 추억을 없애고, 재는 순수를 덮는다. 현실 세계다. 이별의 순간이 온 것이다.
'역지사지' 가 생각났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내가 시마무라 였다면? 내가 고마코였다면? 그 처지가 되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우연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이 세상은 흔들림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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