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양 철학자가 노자의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 를 가지고 몇 시간을 강의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글귀가 노자사상의 핵심이고 나머지는 해설에 불과한 듯이 얘기했다.
얼마전 유튜브에서 한 문학교수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십여 쪽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의 첫 페이지를 가지고 몇 시간에 걸쳐 강의를 했다.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인내심을 가지고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 을 완독은 했으나 현실과 허구의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재미도 없고 뭔 소리인지… 푸코 같은 프랑스 철학자나 저명한 문인, 예술가들에게는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지만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남의 얘기를 빌린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르헤스 문학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문학은 없다. 모든 책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 텍스트'다. 작가와 독자는 텍스트를 매개로 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읊는 사람은 누구나 셰익스피어다. 인간은 허구의 창조자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허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허구다. 우리는 어둠을 견디기 위해 꿈을 꾼다. 우리는 꿈을 꾸지만 누군가의 꿈속의 인물이기도 하다. 위대한 작가는 후배 작가들의 글 속에서 희미하게 되살아나 영생을 누린다. 작가는 누구나 앞선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기에 독창적인 그 누구도 아니지만, 오히려 아무도 아니기에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의 단편소설은 다시 쓰기, 혹은 추리 소설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르헤스는 착상을 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 그 착상을 서술한 책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 사실과 책, 인물에 대해 평을 하는 식으로 적는다. 그 사실과 인물, 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리고 서술이 핵심에 닿을 때 쯤이면 어김없이 문장을 끝내 문장과 서술, 상상의 갈증을 표현한다. 이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고 평했다.
해체 사상이 의미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원주의 시대의 소설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역사성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회복하고, 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조망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 시작해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문학사, 나아가 지성사의 키워드 대부분을 섭렵한 인물. 굳이 이름 붙이자면 환상소설에 가깝지만 보르헤스 소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환상적 사실주의로서 20세기 모더니즘의 경직된 세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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