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은 긍적적이고 무거움은 부정적이라했다. 묵직함은 끔직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그의 말이 맞을까?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나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하여 후생을 수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한번은 중요치 않다. 한번 뿐인 것은 없었던 것과 같다.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짧은 간격을 두고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만 3번 이상은 안되고 수년 동안 한 여자를 만날수 있지만 3주 이상의 간격을 한다는 토마스의 바람기 원칙은 가벼움이다. 여섯 개의 우연으로 만나 정절 밖에는 줄게 없었던 테레사는 무거움이다.
그 둘은 프라하에 살았지만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으로 취리히 병원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얼마후 토마스에 종속된 생활에 버거움을 느낀 테레사가 프라하로 되돌아 간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는 베토벤 마지막 4악장을 떠올리며 토마스는 테레사를 쫒아 프라하로 간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징들이 교차한다.
베토벤은 무거움을 긍정적으로 간주했다. 무거움은 필연성 그리고 가치와 내면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바람기에 고민하고 두려워하지만 토마스는 사랑과 섹스는 별개라고 말한다. 테레사는 과연 그것이 그럴까하는 의심 속에 육체에 의해 영혼을 배신하는 시도를 해보지만 토마스 말처럼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테레사 때문에 많은 것을 버리고 취리히에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
토마스의 섹스 파트너였던 사비나를 유혹하는 것은 정조가 아니라 배신이었다.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을 야기하며 그러한 배신들은 점점 먼 곳으로 이끌어 갔다. 사비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프란츠의 사랑을 배신하고 미국으로 간다. 매번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하지만 그녀를 짓눌렸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녀는 가벼움의 상징 속에서 죽고 싶었다.
사비나를 사랑한 프란츠는 시위행렬을 즐겼다. 뭔가를 기념하고, 뭔가를 요구하고, 뭔가에 대해 항의하고, 혼자 있지 않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결국 캄보디아로 가서 시위 행진에 참여하며 깨닫는다. 현실이란 꿈을 뛰어 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진정한 삶은 동거 중인 안경 낀 여학생이라는 현실을... 얼마 뒤 그는 강도에 의해 허무하게 급사한다.
공산당 비판 투고에 대한 해명을 거부한 토마스는 소련의 압력에 시달리다 의사를 포기하고 그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유리 청소부가 된다. 그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중 포로가 된 스탈린의 아들은 공동 변소를 더럽게 사용하여 변기 청소라는 모욕을 당했다. 분을 참지 못한 스탈린 아들은 고압 철조망을 붙들고 죽었다.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 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부피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똥이 부정되고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미학적 이상이 키치다.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다. 하나의 정치적 흐름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곳에서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앞에서는 이해가 가능하고 그 뒤로 가야 이해가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사비나는 자기 그림의 의미를 설명했다. 사람들이 그녀의 삷을 가지고 만들어내려고 했던 키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녀는 처절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누구도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다.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인 셈이다.
프란츠가 좋아했던 대장정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성향의 좌익 인사들을 묶어주었던 정치적 키치였다. 대장정이란 앞을 향한 멋진 전진 그리고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우정, 평등,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었다. 좌익 인사를 좌익 인사답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이론이라도 대장정이라 불리는 키치 속에 통합하는 능력인 것이다. 키치의 정체는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이미지, 메타포, 용어로 결정된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토마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 테레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이상한 행복과 슬픔을 느꼈다. 슬픔이란 마지막 역에 있단 의미이고 행복은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시작부터 니체의 영원 회귀를 언급하며 혼란에 빠뜨린다. 저자는 영원히 회귀하는 역사, 사상 등을 무거움으로 설정하고,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을 가벼움으로 설정하지만 끝없이 삶과 역사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교차시킨다.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움이 긍정적이라 했지만 베토벤은 무거움이 긍적적이라 했다.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의 삶도 가볐거나 무거움으로 점철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번 사는 삶이기에 그 삶이 가볍다 또는 무겁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니체의 영원 회귀로 본다면 모든게 가벼울 수 있지만 그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반복은 무의미하다.
얼마 전 밀란 쿤데라의 타계 소식이 들렸다. 전에 이 책을 읽었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적어 놓았던 것도 없다. 그래서 다시 읽어야만 했다. 가볍게 읽기엔 무겁다. 무엇이 가벼운지 무거운지 어떤게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인지 여전히 판단하기 어렵다. 아니면 가벼움과 무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차이가 거의 없는지도 모른다.
회의를 하는 자만이 인간다울 수 있다는 얘기가 나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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